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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마이단의 목격자, - 크리미야의 인형사

전편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스트렐코프는 2014년 1월 말, '정교 역사'등의 관련된 유물등을 보호하기 위한 등의 이유로 키예프에 진입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중, 유로마이단 운동에 대한 자료와 여러 언론매체등을 수집하며 이들을 관심있게 조사했으며, 그리고 일이 끝나자마자, 직접 그 운동 현장속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는 직접 확인한 결과로 이들은 완벽히 잘 갖추고 있고, 조직되어 있음을 파악하여 이 운동이 차후 거대한 운동이 될것을 직감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로마이단에 대한 직접 목격함으로 '우크라 언론과 매체의 힘'을 예측하게됩니다.
그 이후, 키예프에서 더 머물렀는지는 의문이지만, 2월 초의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키예프에서 만약 더 오래있었으면, 2월 초중순에 있었던 저격사건의 진주인공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설을 내놓은 이유(SBU도 한번 이런 주장을 내세운적이 있었습니다.)는 나중에 설명해 드립니다.
2월 중순, 크림반도의 무명 정치인, 악쇼노프는 갑작스레 세를 불리고 있었고, 그의 자경단은 어디에서 조직되고 군에는 문외한인 악쇼노프가 훈련시켰다고 보기엔 너무 잘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월 27일,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자경단과 함께, 크림 의회를 점거하고, 자신이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자경단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러시아군의 개입과 여러 호재등으로 무장과 여러 상황도 좋아져 언제부터인가 크림의 치안을 담당하는 준군사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준군사조직은 악쇼노프의 명에 있다고 했지만..
스트렐코프는 2월 중순부터 악쇼노프의 '군사적 총 관계자'로써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은 그가 가지되, 조종은 스트렐코프가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 이렇게 크림에서 손을 쓰고 있었던 스트렐코프는 4월까지 안정화에 계속 암약했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스트렐코프가 크림에서 민병대를 이끌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던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 유로마이단이 자신의 계획에 도움이 될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4월 8일. 스트렐코프는 케르치의 페리를 통해 로스토프로 사라지고, 크리미야는 그 이후, 러시아 영토가 됩니다.
슬라뱐스크, 항명, 사수, 방아쇠

'이사람을 보면 당장 SBU에 신고하세요!' - 얼굴이 공개되기전 스트렐코프의 몽타주, 우크라 전국에 퍼져있었다.
4월 중순, 유로마이단 이후, 러시아 침공 공포와 이후의 실정으로 동부지역에 대한 불안심리가 가중되었고, 여기저기서 민병대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우크라 정부는 진압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저기에서, 크림을 따라한 '아류작' 공화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하리코프, 오데사, 케르손, 루간스크, 도네츠크 등의 여러 동부 주에서 친러 시위등이 일어나며, 몆몆 주의 청사를 점거하기에 이릅니다.
그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도네츠크, 루간스크등은 성공적으로 씨앗을 뿌리는데에 성공하자, 스트렐코프는 우크라 본토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합니다.

'내가 왜 이런 무기를 가지고 있냐구?'
이떄, SBU가 주장하던 '키예프 저격주동자'에 대한 언급을 시작하겠습니다.
1. 이 민병대원은 크림에서 활동했습니다.
2. 스트렐코프의 휘하에 있었던것으로 추정됩니다.
3. 동부 사태에도 스트렐코프가 있었던 곳에서 등장했습니다.
4. 키예프 저격 피해자의 몸속에서 서방 규격 탄환이 발견되었습니다.
5. 스트렐코프는 키예프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즉 스트렐코프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 = 계획의 기폭을 위한 발판으로 이런 일을 꾸몄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습니다. '키예프'에도 의심 받지 않던 이런 자인데, 무슨 짓이든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진 추측일뿐, 그에 대한 이야기처럼 수수께기로 남을듯 싶습니다.
본론으로 다시 들어가서,그렇게 도네츠크로 진입한 스트렐코프는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이 가장 심하고, 자신을 도와줄수 있는 강력한 민병대원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근처의 고를로브카의 지역 민병대장인 '유령' 이고르 베즐레르와 결탁하며, 동부에 있는 친 정부 경찰세력과 SBU등을 와해시키고, 자신의 세력하에 두게 됩니다.

'이고르 베즐레르' - 호출부호 '유령'
베즐레르는 소련 VDV 향우회를 이끌고 있었으며, 지역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유로마이단 - 크림사태 당시 크림에 다녀온적이 있으며, 이미 스트렐코프와 이야기가 되었듯이, 그 이후부터 민병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베즐레르의 고를로브카 경찰청 급습 - 처형, 스트렐코프의 크라마토르스크 경찰청장 등극 - 고를로브카의 정치인 납치 - 암살(4월 17일 볼로지미르 류박 납치 - 암살), 슬라뱐스크 SBU 지부 점령등의 일으로, 우크라이나 보안 당국은 혼란을 느끼며, 이들이 대체 무엇을 하는 자들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하지만 GRU측의 사보타주 팀이라는 것을 주장할수 밖에 없을정도로 불충분한 정보만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SBU측은 '사수' 라는 호출부호를 가진 정체불명의 민병대장이 SBU 슬라뱐스크 지부를 조져놓았다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이렇게 세력을 다져놓자, 우크라이나는 동부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군을 투입하였습니다. - 제25 근위 공수여단을 말입니다. 본부에서 파견된 부대는 슬라뱐스크와 크라마토르스크, 골로브카에 대한 진압을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옳지못한 명령 - 민간인도 폭도로 보아 진압하라는 명령과 + 난장판의 주역 프라비 섹토르와의 협력을 강요한 명령때문에, 부대원들은 집단 항명을 하게 됩니다. 그를 틈타, 스트렐코프는 '회유'를 시작합니다.
항명한 부대원들에게 '슬라뱐스크, 동부들을 위해' 싸워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대원들은 어짜피 상황이 이렇게 된거 돌아가서 아니꼽게 보이는 정부에 대해서 반항의 의미로 많은 대원들이 장비들을 이끌고 슬라뱐스크 민병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초유의 상황은 '돈바스 인민군' 이라고 불리우는 동부의 군사세력에서 스트렐코프의 입지가 강력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일을 계속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체제를 시험하면서 슬라뱐스크 지역의 혼란 - 차후 정식적으로 등장하게될 도네츠크 공화국의 씨앗을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 그는 그 이후 4월 26일, 돈바스 인민군의 사령관이 됩니다. 그이후, SBU의 대테러부대 알파 장교 3명을 포획하고, 그들을 공개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내가, 바로 '사수' 이고르 이바노비치 스트렐코프, 돈바스 인민군의 사령관이다.'
그는 첫 공식 인터뷰를 통해 3명의 SBU 고위 장교를 도네츠크 공화국의 중요요인인 파벨 구바레프를 구출하기 위해 포로를 교환하자며 언급했고, 동부의 독립을 위해 뛸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투표를 통하여, 두 국가는 독립이 되었고, 우크라이나는 축하포로 군사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대테러작전'을 펼칩니다. 5월 2일.. 드디어 공습이 펼쳐지며, 스트렐코프에게 전면적인 반격에 나서는데..
- 다음에 계에속?
- 어떻게 보면, 스트렐코프가 모든것을 짰을수도 있습니다. 유로마이단의 폭력화, 크림, 지금 동부까지.. 대체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
유로마이단의 목격자, - 크리미야의 인형사

전편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스트렐코프는 2014년 1월 말, '정교 역사'등의 관련된 유물등을 보호하기 위한 등의 이유로 키예프에 진입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중, 유로마이단 운동에 대한 자료와 여러 언론매체등을 수집하며 이들을 관심있게 조사했으며, 그리고 일이 끝나자마자, 직접 그 운동 현장속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는 직접 확인한 결과로 이들은 완벽히 잘 갖추고 있고, 조직되어 있음을 파악하여 이 운동이 차후 거대한 운동이 될것을 직감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로마이단에 대한 직접 목격함으로 '우크라 언론과 매체의 힘'을 예측하게됩니다.
그 이후, 키예프에서 더 머물렀는지는 의문이지만, 2월 초의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키예프에서 만약 더 오래있었으면, 2월 초중순에 있었던 저격사건의 진주인공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설을 내놓은 이유(SBU도 한번 이런 주장을 내세운적이 있었습니다.)는 나중에 설명해 드립니다.
2월 중순, 크림반도의 무명 정치인, 악쇼노프는 갑작스레 세를 불리고 있었고, 그의 자경단은 어디에서 조직되고 군에는 문외한인 악쇼노프가 훈련시켰다고 보기엔 너무 잘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월 27일,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자경단과 함께, 크림 의회를 점거하고, 자신이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자경단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러시아군의 개입과 여러 호재등으로 무장과 여러 상황도 좋아져 언제부터인가 크림의 치안을 담당하는 준군사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준군사조직은 악쇼노프의 명에 있다고 했지만..
스트렐코프는 2월 중순부터 악쇼노프의 '군사적 총 관계자'로써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은 그가 가지되, 조종은 스트렐코프가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 이렇게 크림에서 손을 쓰고 있었던 스트렐코프는 4월까지 안정화에 계속 암약했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스트렐코프가 크림에서 민병대를 이끌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던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 유로마이단이 자신의 계획에 도움이 될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4월 8일. 스트렐코프는 케르치의 페리를 통해 로스토프로 사라지고, 크리미야는 그 이후, 러시아 영토가 됩니다.
슬라뱐스크, 항명, 사수, 방아쇠

'이사람을 보면 당장 SBU에 신고하세요!' - 얼굴이 공개되기전 스트렐코프의 몽타주, 우크라 전국에 퍼져있었다.
4월 중순, 유로마이단 이후, 러시아 침공 공포와 이후의 실정으로 동부지역에 대한 불안심리가 가중되었고, 여기저기서 민병대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우크라 정부는 진압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저기에서, 크림을 따라한 '아류작' 공화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하리코프, 오데사, 케르손, 루간스크, 도네츠크 등의 여러 동부 주에서 친러 시위등이 일어나며, 몆몆 주의 청사를 점거하기에 이릅니다.
그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도네츠크, 루간스크등은 성공적으로 씨앗을 뿌리는데에 성공하자, 스트렐코프는 우크라 본토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합니다.

'내가 왜 이런 무기를 가지고 있냐구?'
이떄, SBU가 주장하던 '키예프 저격주동자'에 대한 언급을 시작하겠습니다.
1. 이 민병대원은 크림에서 활동했습니다.
2. 스트렐코프의 휘하에 있었던것으로 추정됩니다.
3. 동부 사태에도 스트렐코프가 있었던 곳에서 등장했습니다.
4. 키예프 저격 피해자의 몸속에서 서방 규격 탄환이 발견되었습니다.
5. 스트렐코프는 키예프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즉 스트렐코프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 = 계획의 기폭을 위한 발판으로 이런 일을 꾸몄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습니다. '키예프'에도 의심 받지 않던 이런 자인데, 무슨 짓이든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진 추측일뿐, 그에 대한 이야기처럼 수수께기로 남을듯 싶습니다.
본론으로 다시 들어가서,그렇게 도네츠크로 진입한 스트렐코프는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이 가장 심하고, 자신을 도와줄수 있는 강력한 민병대원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근처의 고를로브카의 지역 민병대장인 '유령' 이고르 베즐레르와 결탁하며, 동부에 있는 친 정부 경찰세력과 SBU등을 와해시키고, 자신의 세력하에 두게 됩니다.

'이고르 베즐레르' - 호출부호 '유령'
베즐레르는 소련 VDV 향우회를 이끌고 있었으며, 지역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유로마이단 - 크림사태 당시 크림에 다녀온적이 있으며, 이미 스트렐코프와 이야기가 되었듯이, 그 이후부터 민병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베즐레르의 고를로브카 경찰청 급습 - 처형, 스트렐코프의 크라마토르스크 경찰청장 등극 - 고를로브카의 정치인 납치 - 암살(4월 17일 볼로지미르 류박 납치 - 암살), 슬라뱐스크 SBU 지부 점령등의 일으로, 우크라이나 보안 당국은 혼란을 느끼며, 이들이 대체 무엇을 하는 자들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하지만 GRU측의 사보타주 팀이라는 것을 주장할수 밖에 없을정도로 불충분한 정보만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SBU측은 '사수' 라는 호출부호를 가진 정체불명의 민병대장이 SBU 슬라뱐스크 지부를 조져놓았다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이렇게 세력을 다져놓자, 우크라이나는 동부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군을 투입하였습니다. - 제25 근위 공수여단을 말입니다. 본부에서 파견된 부대는 슬라뱐스크와 크라마토르스크, 골로브카에 대한 진압을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옳지못한 명령 - 민간인도 폭도로 보아 진압하라는 명령과 + 난장판의 주역 프라비 섹토르와의 협력을 강요한 명령때문에, 부대원들은 집단 항명을 하게 됩니다. 그를 틈타, 스트렐코프는 '회유'를 시작합니다.
항명한 부대원들에게 '슬라뱐스크, 동부들을 위해' 싸워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대원들은 어짜피 상황이 이렇게 된거 돌아가서 아니꼽게 보이는 정부에 대해서 반항의 의미로 많은 대원들이 장비들을 이끌고 슬라뱐스크 민병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초유의 상황은 '돈바스 인민군' 이라고 불리우는 동부의 군사세력에서 스트렐코프의 입지가 강력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이런일을 계속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체제를 시험하면서 슬라뱐스크 지역의 혼란 - 차후 정식적으로 등장하게될 도네츠크 공화국의 씨앗을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 그는 그 이후 4월 26일, 돈바스 인민군의 사령관이 됩니다. 그이후, SBU의 대테러부대 알파 장교 3명을 포획하고, 그들을 공개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내가, 바로 '사수' 이고르 이바노비치 스트렐코프, 돈바스 인민군의 사령관이다.'
그는 첫 공식 인터뷰를 통해 3명의 SBU 고위 장교를 도네츠크 공화국의 중요요인인 파벨 구바레프를 구출하기 위해 포로를 교환하자며 언급했고, 동부의 독립을 위해 뛸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투표를 통하여, 두 국가는 독립이 되었고, 우크라이나는 축하포로 군사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대테러작전'을 펼칩니다. 5월 2일.. 드디어 공습이 펼쳐지며, 스트렐코프에게 전면적인 반격에 나서는데..
- 다음에 계에속?
- 어떻게 보면, 스트렐코프가 모든것을 짰을수도 있습니다. 유로마이단의 폭력화, 크림, 지금 동부까지.. 대체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
덧글
파신스키는 M-16계열 저격용 소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는데요?
http://www.liveleak.com/view?i=ec1_1392923593
파신스키는 이후에 키예프 정권, 투치노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었더군요.
과도한 자신감은 오히려 자신을 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