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련 전산화의 제안의 첫 기수였던 아나톨리 키토프의 중앙경제통제망은 제안은 당시에 당원들의 지지를 충분히 받을수가 없었다. 언급했듯, 베르크와 같은 주요 지지세력을 노환으로 잃었던 점도 있고, 흐루쇼프의 혁신적 경제개선안을 편승하려고 하였지만, 흐루쇼프는 전산화에 대한 견해가 당의 통제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는 것에 구현이 될 리가 없었다. 이러한 것은 공산당도 동일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키토프는 주장했다.
아나톨리 키토프는 또한 기존 계획의 구현에는 사실상 ‘천지창조’와도 같은 구성계획을 말했던 듯 싶다. ‘빛이 있으라!’ 하면 네트워크가 구성이 될줄 알았다는 수준까지는 아니겠지만, 그의 구성안은 ‘붉은 책’에서 나와있듯, 컴퓨터의 생산을 향상시켜, 이러한 체계에 필요한 컴퓨터들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이 컴퓨터로 정확하게 무엇을 구성해야 한다는 내용은 부족하였다는 한계점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고, 더 구체적인 제안으로 발전 시킨 것이, 키예프 사이버네틱스 연구소장이였던 빅토르 글루쉬코프의 오가스 시스템이였다. 또한, 군부의 반감을 사고 있었던 기존의 ‘전시-평시 시스템’과 같은 군사-민간 통합 전산망에 대한 구상도 사라져 있었고, 혁신을 원했던 코시긴 수상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1년도부터 개념구성단계에 있던 오가스는 타 경제학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봉착했고, 통제망과 시스템을 구현하는데 필요한 행정부들은 독점 가능한 정보처리 통합한다는 것에 대해 각 행정부의 독립된 권한과 통제력이 낮아진다고 판단하여,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행정부처들은 또한, 부서별 정보처리에 필요한 전산화 구축에 대해서는 협력적인 입장을 밝혔으나, 오가스 시스템은 부서별 독립적인 정보화를 꿈꾸는 것이 아닌 부처간 통합 정보화 시스템을 우선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이였다. 이는 앞에 설명한 소련 관료제 속에서의 영향력 투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즉 상호간에 입장이 엇갈려 있기 때문에, 중앙당의 강력한 영향력외에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 차원에서도 1980년에 제안한 통제망/시스템의 구현비용이 750억 루블, 당시 1980년의 국가지출의 5.8%(당시 국방비와 동일)로, 비용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중앙당은 제안에 대해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입장을 내놓았을 뿐이며 1982년, 개발중책인 글루쉬코프의 요절로 인한 계획의 구심점이 사라짐에 따라 표류하였다.
또한, 당을 설득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또 한가지 있는데, 당시의 컴퓨터는 전국의 행정과 경제 데이터들을 수집하고, 처리할만한 성능이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당시 글루쉬코프와 연구소 직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개선수단을 고려하였으나, 그 기술적 문제 개선안들은 실현되지 못했다.
오가스 계획은 소련 전산망의 기초 토대만을 구성했다, 더구나 1985년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기존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변혁을 주장하는 페레스트로이카 – 사실상의 시장경제 도입을 선언하게 되면서, 더 이상의 경제계획보조에도 사용이 불가능하고,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1986년 당대회 당시에 열린 기술대회에서도 오가스 중앙통제식 전산망체제는 관심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산화에 대한 기본적인 안건에 대한 토론이 오갔지만, ‘계획경제와 국가운영의 현대화로써’의 시스템 언급은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1991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제대로된 전국 전산화 구현에 실패하였다.
- 디씨나 이글루스는 각-주를 달수가 읎으니 답답하구먼요.
모험주의를 택하지 않았으니 쏘련 정보화는 읎었다!
- 그런데, 이 시스템은 모 소련 시뮬레이터 게임에서 구현할수 있다고 하더군요 ㅋㅋ
덧글
곧 글을 종합해서 소련 정보화사회의 구현시도와 실패에 대해 긴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영으로 하려 했었던 게 패착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