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21세기는 이른바 정보화 시대라고도 불리는 시대이다. 주위에 컴퓨터가 들어가지 않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2018년에 다다른 지금 사회망과 정보망이 융합되는 시대, 다시 말해 우리는 복잡한 민원 과정을 몆십 분 만에 처리할수 있는 정도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연계가 강화되고, 빠른 행정 처리와 더붙어서 전국의 사회적 정보망이 구성이 되어가고 있다. 즉, 대용량의 데이터를 수집해 해당 지역에 필요한 기간사업이나 주민들의 요구를 기존보다 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Ⅱ. 본 론
1. 기존계획경제의 한계와 사이버네틱스
소련은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볼셰비키 혁명(10월 혁명)을 통해 구성되었다. 이후 적백내전 시기의 전시공산주의의 도입으로 파괴된 경제 상황을 시장경제를 일부 도입한 NEP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나, 1928년 스탈린의 주도로 고스플란의 산업화 계획, 즉 5개년 계획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는 기존의 시장경제와는 다르게,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이 중심이 아닌, 중앙에서 목표생산량을 계산하고 계획을 발표 후 생산자는 계획을 수행하고 목표를 달성하여 사회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형태의 경제체제로써. 당시에 소련의 급격한 산업화의 성공을 보여줌에 있어, 다양한 국가들이 이러한 성공을 참고하게 된다. 하지만 고스플란의 계획 구성에 있어서, 자세히 분석하다 보면, 당시의 중앙 지도층의 ‘낙관적’ 구상으로 인한 불가능하거나 비현실적인 목표, 넓은 영토에 대한 행정적 부담, 목표달성 실패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 집행하는 행정/산업 계획 집행시 생산 통계 조작, 그리고 아무런 근본 없이 밀어붙인 계획 때문에 미숙한 노숙자들이 대량생산하는 도중 들어나는 생산품의 낮은 품질로 경쟁력은 낮았고, 강압적인 집단화와 국가의 폭력적인 대응에 농민과 노동자들은 고통 받았으며, 당내 공포정치로 주요 전문가들의 건전한 비판마저도 마비 된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여기서, 계획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 통계의 정확도와 그 통계를 기반으로 한 계획의 효율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5개년 계획에서도 언급되듯, 아무리 5개년 계획이 소련의 산업화를 구현한 성공적인 결과였다 하더라도 중요한 부분에서 위 같은 결함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나 브레즈네프시기에 있었던 일련의 개혁들은 이런 결함을 개선해 계획경제를 보다 더 좋은 효율을 낼 수 있게 하는 성과를 기대했지만.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실패한 개혁들, 대표적으로 흐루쇼프의 효율적인 행정을 위한 조직 재구성을 수행하려 하였으나 행정간 혼란만 가중시켰고, 이후 브레즈네프 당시 코시긴 개혁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표류를 통해서 5개년 계획이후 소련 계획경제 비효율성의 그 자체인 비대한 관료주의의 문제점은 더 심화되었으며, 이렇게 결함은 계속해서 악화만 되어갔다. (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창작과비평사, 김남섭 옮김, 1998), pp362-427)
이러한 계획경제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행정개선안(대부분 실패했다고 언급하였지만)들 외에도, ‘기술적’ 개선안이 195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컴퓨터 과학, 즉 사이버네틱스(러시아어로 키베르네틱스)은 소련에도 유입되었으며, 사이버네틱스를 위에 언급되었던 중앙통제로 인한 계획경제의 효율성 문제해결은 자동화된 정보네트워크 망 구성에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구상은 일련의 경제학자들이 찬동하였고, 당시 흐루쇼프의 개혁기조에 따라 소련 사이버네틱스 학술원들은 지역에 ‘수학적 경제’ 연구를 위한 컴퓨터 센터들을 설립하는 등 기초적 성과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믿음은 소련 국방부에서 주관하는 군사목적 컴퓨터 센터의 성공적인 임무수행으로 뒷받침 되었다.
소련의 사이버네틱스의 기초적 성과는 대부분 군사적 임무에서 시작되었다. 50년대, 당시 미국의 군사목적 통제 컴퓨터 시스템(SAGE)에 자극받은 소련 측은 미국의 SAGE와 유사한 대공통제시스템, 우주감시시스템에 사용될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Slava, Gerovitch. 『InterNyet: why the Soviet Union did not build a nationwide computer network,』, (History and Technology 24:4, 2008) pp335-350)
이러한 기술발전에 필요성을 역설하던 인물은 소련군 대령이자 소련 내 사이버네틱스 도입에 대하여 대표적인 찬성자였던 아나톨리 키토프(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Китов) 대령이었다. 키토프는 1950년대 소련 내 주요 사이버네틱스 논문의 공동 집필자이자, 자신의 강력한 주장으로 도입한 국방부 제1 컴퓨터센터의 성공적인 임무수행으로 영향력이 높아져 있었다, 그는 자신과 동일한 찬성자들을 규합해 정치적인 요구를 하였고, 키토프의 가장 큰 지원자였던 악셀 베르크(Аксель Иванович Берг) 제독과 같은 다양한 지지자들의 등장에 힘입어, 1959년 흐루쇼프에게 소련의 중앙국가통제망에 대한 계획서를 제안했다. 이 편지에서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낙관적이고, 야망에 찬 발언도 섞여 있을 정도로, 키토프는 사이버네틱스에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사이버네틱스 지지자들은 타격을 입었음에도,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1962년 지지자 중 하나이자 선도적 엔지니어인 알렉산드르 하르케비치(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Харкевич)의 ‘국가적 정보교환시스템’을 개설하는 것을 제안하였고, 텔레비전, 전화, 전보와 같은 모든 통신신호를 디지털화 하여, 하나의 국가규모 컴퓨터 네트워크에 들어가 ‘정보수송’을 가능케 하도록 하여, 네트워크에 연결된 부서들 마다 필요한 정보제공에 대해 자동으로 즉각 수행이 가능케 하는 시스템 이였다. (Kharkevich, Aleksandr. 『Informatsiia i tekhnika』, (Kommunist, 1962), pp93-102. Slava, Gerovitch. 『InterNyet: why the Soviet Union did not build a nationwide computer network,』, (History and Technology 24:4, 2008) pp335-350 에서 재인용.)
사이버네틱스 지지자들이 제안한 주요 ‘정보화 계획경제시스템’은 대표적으로 2개가 존재한다. 가장 첫 번째로 제안된 키토프의 ‘중앙국가통제망’(ЕГСВЦ)과 중앙국가통제망 계획을 조금 더 구체화 하고 수정한 글루쉬코프의 ‘전연방자동정보처리시스템’(ОГАС)가 존재한다. 이 두 체계에 대한 설명은 다음 장에서 언급한다.
2. 소련 네트워크의 개념과 도입 시도

출처 - https://alexeybright.livejournal.com/6703.html (권력의 기계, 3부)
(1) 중앙국가통제망(ЕГСВЦ)
1959년, 소련군 포병 대령이자 컴퓨터 과학자였던 아나톨리 키토프가 흐루쇼프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시한 다목적자동운영시스템(Multi-Automatic Control System) 계획으로, 소련 내에 있는 경제, 행정, 학술, 군사시설에는 말단 컴퓨터망(низовые центры), 이러한 컴퓨터 시설을 관리하는 중간허브(вычислительные центры обслуживания), 최종적으로, 시설망에서 수집한 경제/행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동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계획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중앙허브들이 연결된 중앙국가통제망(ЕГСВЦ)으로 구성된다.
키토프는 중앙국가통제시스템의 도입으로 소련 계획경제를 ‘자동화’로 재구축하려고 한 것이며, 이러한 전산계획경제를 책임질 자동운영시스템의 개발, 조율, 운용을 위한 전 소련 정치적 협의체 –고스코무프르(Госкомупр)를 제안했다. 또한 키토프는 소련 전국에 네트워크를 구성하기 위하여 컴퓨터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고 흐루쇼프에게 호소하였다,

연방망, 공화국망, 지역망의 모습.
(2) 전연방자동정보처리시스템(ОГАС)
글루쉬코프는 소련 전국에 컴퓨터 통제망을 형성하고 운영체제인 오가스를 개발하여, 전 소련의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문서관료제와 계획경제에서 빠른 통신과 효율적인 컴퓨터-자동운영시스템으로 하여금 전자계획경제와 행정으로 이어가고자 하였다.
오가스는 소련 행정조직 내(행정부, 고스플란, 과학기술위원회(ГКНТ), 물류조직(МТС)) 보유하고 있는 모든 정보망을 하나의 자동운영체제에 통합한 것이며, 오가스를 통해 소련 전국의 모든 공장들과 농장들, 그리고 연구시설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말단 컴퓨터망, 수집된 정보를 전달하는 데이터전송센터와 이를 처리하는 컴퓨터 센터들이 구축되어 신속하고 정확한 5개년 계획안을 수립하여, 이를 수행하도록 자동으로 말단 컴퓨터 망으로 계획을 보내 경제/연구주체들이 정확한 계획을 수령 받아 하는 것이다. (『Pioneers of Soviet Computing』. . https://www.sigcis.org/files/SIGCISMC2010_001.pdf.)
복잡한 행정절차와 문서들, 그리고 복잡한 처리과정에서 일어나는 혼선과 궁극적으로 과장되거나 달성되지 못하게 되는 기존의 계획경제보다 더욱 효율적일 것이라고 글루쉬코프와 개발진은 평가했다.
1980년, 글루쉬코프는 오가스의 기본적인 통제망 구성(ГСВЦ - 국가컴퓨터센터망)에 긍정적 결과가 나오자, 오가스를 계획경제의 부분에서만이 아닌, 일반사회복지와 같은 분야에도 통합하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소련 내 인구의 자동인구건강정보처리(медицинского учета населения), 주거정보자동처리(коммунальных платежей), 고용정보자동처리(трудовых отношений), 그리고 모든 서비스와 재화에 대한 ‘무현금지불’(безналичную форму расчета гражданами за приобретение товаров и услуг)등을 구현하려고 했다. 즉 1990년에 기초적으로 구성될 오가스 체제는 진보한 계획경제를 넘어선 ‘정보화 사회주의’의 구성을 목표로 한 것이다.
(1990년에 구성될 기본적인 통제망의 모습.)
구현될 통제망은 크게 3개의 중추로 이뤄지며, 모스크바에 구축된 연방단계의 모든 계획/복지를 처리하는 ‘연방’ 망, 각 연방 공화국의 수도에 위치한, 공화국 내 경제계획, 사회복지의 정보를 처리하는 ‘공화국’ 망, 그리고 공화국 내 기본적인 지역경제와 복지를 처리하는 ‘지역’ 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구성이 완료되었을 1990년에는 기본적인 지역망과, 공화국망, 그리고 연방망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3. 네트워크 구성 실패와 요인
중앙국가통제망을 제안한 소련 정보화의 첫 기수였던 아나톨리 키토프의 제안은 당시에 당원들의 지지를 충분히 받을 수가 없었다. 베르크와 같은 중앙당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지자가 정계에서 은퇴한 점과, 흐루쇼프의 혁신적 경제개선안을 편승하려고 하였지만, 흐루쇼프는 전산화에 대한 견해가 당의 통제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에는 흐루쇼프와 그의 주요 당원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키토프는 주장했다.
아나톨리 키토프의 제안을 실험적으로 구현한 1965년 리보프 운영시스템을 통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으나, 조금 더 복잡한 계획경제 관리업무를 수행하는 ‘쿤체보’ 운영시스템을 개발 도중 기존의 소련이 보유한 컴퓨터로는 원활한 계획능력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고. 성능개선엔 더욱 높은 비용을 요구했고, 공산당은 계획에 투자하기에 부담감을 느꼈다.(『АСУ «Львов» и «Кунцево»: роль и значение』. (2018년 12월 18일). http://www.computer-museum.ru/articles/sorucom_2011/81/.)
글루쉬코프의 오가스 시스템은. 군부의 반감을 사고 있었던 기존의 ‘전시-평시 시스템’과 같은 군사-민간 통합 전산망에 대한 구상이 없어졌으며, 초기 브레즈네프 시기, 계획경제의 혁신을 원했던 코시긴 수상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1년도부터 개념구성단계에 있던 오가스는 이전의 체계와 동일하게 경제학자들의 비용과 효율면에서 격렬한 반대에 봉착했고,(Кузнецова, 2005) 통제망과 시스템을 구현하는데 필요한 행정부들은 독점 가능한 정보를 통합한다는 것에 대해 각 행정부의 독립된 권한과 통제력이 낮아진다고 판단하여,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행정 부처들은 또한, 부서별 정보처리에 필요한 정보망 구축에 대해서는 협력적인 입장을 밝혔으나, 글루쉬코프는 부서별 독립적인 정보화를 꿈꾸는 것이 아닌 부처 간 통합 정보화 시스템을 우선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앞에 설명한 소련 관료와 과학자는 상호간에 입장이 엇갈려 있기 때문에, 답보에 빠졌고 중앙당의 강력한 영향력 외에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 차원에서도 1980년에 제안한 통제망/시스템의 구현비용이 750억 루블, 당시 1980년의 국가지출의 5.8%(당시 국방비와 동일)로, 비용 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중앙당은 제안에 대해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입장을 내놓았을 뿐이며 1982년, 개발중책인 글루쉬코프의 요절로 인한 계획의 구심점이 사라짐에 따라 표류하였다.
오가스는 기초 토대는 구성되었지만, 악재와 공산당의 소극적 태도에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했고, 1985년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기존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변혁을 의미하는 페레스트로이카 – 사실상의 시장경제 도입을 선언하게 되면서, 오가스는 더 이상의 계획경제보조에도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1986년 제27차 공산당 대회 당시에 열린 기술대회에서도 오가스 중앙통제식 정보망은 관심을 잃었다. 전산화에 대한 기본적인 안건에 대한 토론이 오갔지만, ‘계획경제와 국가운영의 현대화로써’의 시스템 언급은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1991년, 소련의 붕괴까지 오가스 계획을 구현하는데 실패했다.
당시 소련이 사이버네틱스, 정보화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소식은 소련 자체보다 오히려 미국에서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적 오류가 많은 계획경제의 떨어지는 능률을 ‘컴퓨터’의 도움으로 막을수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를 속칭 ‘공산주의의 기계들’이라고 평가하며, 케네디 대통령의 측근은 소련의 컴퓨터와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관심과 개발을 경고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놓지 않으면, ‘우린 끝장입니다.’(We are finished.)라고 표현하면서 소련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Slava, Gerovitch. 『InterNyet: why the Soviet Union did not build a nationwide computer network,』, (History and Technology 24:4, 2008) p.366)
하지만, 소련은 본론에서 설명하였던 대로, 사이버네틱스 기술을 통해 정보화 사회주의를 이룩할 수 있었던 전국 정보화 계획을 결국 91년이 다되면서까지 시도하지 않았고, 그렇게 선전했던 공산주의의 기계가 실제로 소련의 국정운영에 나타나 미국의 두려움을 실현하려는 의지조차도 보이지 않던 이유는 이런 기계를 오히려 공산당 그 자신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술적 진보에 대한 비용과 지역의 정보취득의 간편화으로 일어날 영향력 감소에 대한 공포, 기술에 대한 불신, 행정부내 영향력 주도에 대한 투쟁 또한 그들의 선택의 장애물이 되었다.
소련은 정체되었던 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을 인정하고 개선하기 위해 제도적인 것을 수정하였으나 기술적인 개선안인 정보화에는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소극적인 움직임에 의해, 1950년대 시작된 연방 정보화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공산당은 계획경제의 효율과 국가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소련과 함께 해체된 것이다.
첨언(각주 못다는게 너무 불편하네요 -_-)
- 경제학자 가브릴로 포포프의 견해에 따르면 - 오가스 체계를 기반으로 정보화가 일어날시의 국가통제능력 확대에 대해 경계하면서 ‘전산화 파시즘’이라고 칭하였고, 이전 체제보다 더욱 전체주의적 통제가 쉽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Кузнецова, 2005)
- '공산주의의 기계들'은 1961년 제 22회 소련 공산당 대회 이후, 소련에서 컴퓨터를 선전하기 위한 표현이다.
- 1965년, 중앙국가통제망 내 컴퓨터들이 감당할 정보량은 글루쉬코프의 언급에 따르면 약 5000억 비트 (현재 기준 58 기가바이트)가 망 내에서 처리되며, 2300억 비트(현재기준 26 기가바이트)가 자동생산운영(생산 관리)에 사용된다고 언급했다. 당시로써는 엄청난 양의 정보처리능력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출처 - https://alexeybright.livejournal.com/6703.html (권력의 기계, 3부) )
『ОГАС В. М. Глушкова: История проекта построения информационного общества』. (2018년 10월 2일). https://commons.com.ua/uk/ogas-v-m-glushkova-istoriya-proekta-postroeniya-informatsionnogo-obshhestva/.
『Pioneers of Soviet Computing』. (2018년 10월 9일). https://www.sigcis.org/files/SIGCISMC2010_001.pdf.
Slava, Gerovitch. 『InterNyet: why the Soviet Union did not build a nationwide computer network,』, (History and Technology 24:4, 2008)
『Первый ВЦ и его основатель』. (2018년 10월 2일). https://www.osp.ru/os/2008/05/5205980/.
『АСУ «Львов» и «Кунцево»: роль и значение』. (2018년 12월 18일). http://www.computer-museum.ru/articles/sorucom_2011/81/.
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창작과비평사, 김남섭 옮김, 1998)
Кузнецова, Т. 『К истории Института экономики РАН (АН СССР): домыслы и реалии』 (М.: Институт экономики РАН, 2005)
요약 - 소심한 콩산당!
이쪽 연구 계속하면서 '실제 실험망'(위에 언급된 리보프 자동운영체제)에 대한 성공 사례를 확인할수 있었던게 가장 큰 충격이였습니다. 실험대상은 전국에 비교하자면 보잘것 없지만 (공장과 일부 지역) 그래도 그 시스템이 기본적인 공정관리, 생산품 조달관리, 금융,회계의 자동화가 실제로 성공적인 결과를 보였다니. 허.. 1960년 말의 소련 기술력은 의외로 상당한 수준이였나 봅니다.
물론 공산당이 그 가치를 읽지 못한것도 있지만, 이러한 가치를 읽어 냈더라면, 소련 중앙통제의 한계를 넘어선 무서운 놈들이 되었을 것이라는 건 확신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지만, 특유의 밀어붙이기였다면 가능 했을 겁니다. -ㅂ-
시진핑보고 사이버-펑크 독재라고 하죠? 그걸 21세기 초 소련(...?)의 모습이 될수도 있었다.. 뭐 그런이야기죠 ㅋㅋㅋ 물론 공산당은 그 부분보다는 지역과 중앙의 정보습득의 평등화 때문에 생겨날 '영향력 감소'에 대해 더 신경썼다는게 문제지만 말입니다 -ㅅ-.





덧글
이렇게 경계받고도 오늘날 승자가 되어버린 정보화 혁명
미국: 소련이 시빌라시스템을 개발할지도 모른다!
스카이넷 의문의 1패